2003년 미국 선정
'올해의 여성' 으로 지명
2006년 아시안 아메리칸 저스티스
센터 선정 '미국인 용기상'
2008년 유색인종
오바마 선거 운동 지원
2015년3월 10일 미국
'안수산의 날' 지정
2016 미국 타임지 선정
'이름 없는 여성 영웅'
2018년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연설 중
“미국에 이민 온
최초의 한국인 부부의 딸인
안수산은 가장 큰 시련에 직면했을 때에도
강한 직업윤리, 불굴의 애국심,
소명에 대한 변함없는 헌신으로
미국에 기여했다”
2020년 미국 미국 국무부
'그녀는 선구자, 용감한 장교, 공동체 지도자,
한국계 미국인인 안 여사는 미국의 영웅'
이렇게 엄청난 수식어가 붙은
그녀의 이름은 안수산이다.
도산 안창소 선생의 장녀로
1915년 미국에서 태어났다.
안수산은 아버지 안창호가
미국내 한인 교민들의 사회 활동,
권익 보호, 언론 활동, 교민 사회의 단결과
사회 활동을 지원하는 방법으로
독립 운동에 기여하는 모습을 보고 들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가졌고,
실제로 안창호의 독립 단체에서도 일하며 성장했다.
안수산이 11세일때 도산 안창호는
임시정부의 국무령이 되어 상해로 떠나게 된다.
떠나던 날, 안창호는 안수산에게
"훌륭한 미국인이 되어라.
그러나 한국인의 정신을 잊지 마라."
(Be a good American citizen,
but don't forget your heritage.)
라는 말을 남겼고,
이 말은 안수산이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중시하는 가치로 자리매김한다.
안수산 씨는 생전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아버지로서의 도산을 포기했다.
그는 나라의 아버지지 우리의 아버지는 아니었다"고
할 정도로 아버지 안창호의
나라 사랑이 컸다고 한다.
이같은 말을 전해들은 무한도전 유재석은
"정말 부끄럽고 죄송하다"고 했다.
나라 위해 바친 안창호의 생애를
후손들이 잘 모른는 데 대한 자괴다.
안수산이 성인이 되어
미 해군에 입대한 해는 1942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있던 후이다.
처음 지원했을 때는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탈락했었으나, 재지원해서 입대할 수 있었다.
입대를 지원한 동기는
'일본에 맞섰던 아버지의 싸움을
이어가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엔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이
극심한 시기였기 때문에
안수산은 많은 고비가 찾아온다.
상사인 자신의 명령을
백인 파일럿 부하가
무시하는 것은 기본이고
미국 군복을 입고 있는데도
대우를 받지 못했다.
심지어 미국인 남편과 결혼할 때
타인종과의 결혼을 막던
'인종간 결혼금지법'이 있어서
결혼을 하지 못할 뻔 했다고 한다.
해군정보국으로 갔을때는
아시안계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6개월동안 암호해독 활동에서
배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노력으로
암호해독가로 활약하게 되고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엔
NSA (국가안보국)의
비밀정보분석요원이 되어
부하 300명을 거느리는 씽크탱크를
진두지휘하는 위치까지 올라간다.
이후 그녀는 끊임없이
인권보호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다가
1973년 처음 방한해서 아버지를 뵈었다.
독립기념관에서 78세의 노인이된 딸이
40세 모습의 아버지 밀랍인형과
만남을 갖은 것이다.
그 앞에있는 반짝이는 구두를 보면서
아버지는 매번 신발을 고쳐신었지
저런 새 신을 신은 적이 없어서
낯설다는 이야기도 하셨다고한다.
2015년 6월 24일
101세의 나이로 별세한 후
그 다음해인 2016년
세상의 편견과 차별에 맞서 싸운 인물
미 해군 역사상 최초의 여성장교로
이름을 남긴 인물로 타임지가 선정한
"이름없는 여성 영웅"이 된다.
외국에서도 끊임없이 보여준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의
애국심과 세상을 바꾸기 위한 노력에
존경심을 표하게 된다.